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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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일본 통일을 달성하고 도요토미 정권을 수립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시작하여, 뛰어난 능력과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주군을 섬기며 세력을 확장했다.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하고,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을 거치며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을 제압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을 통해 일본 통일을 완성하고, 관백, 태정대신을 거쳐 태합으로 불리며 정권을 운영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 결렬 후 사망했다. 그는 신분 제도를 도입하고, 오사카 성을 건설하는 등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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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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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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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다른 이름 | 기노시타 도키치로 하시바 히데요시 |
출생 이름 | 히요시마루 |
별칭 | 고자루 (아기 원숭이) 사루 (원숭이) 도요쿠니 다이묘진 |
출생일 | 1537년 3월 17일 |
출생지 | 나카무라구, 나고야, 오와리 국 |
사망일 | 1598년 9월 18일 |
사망지 | 후시미 성, 교토 |
종교 | 신토 불교 |
신성 이름 | 도요쿠니 다이묘진 (豊国大明神) |
사후 법명 | 고쿠타이유쇼인덴 레이잔 슌류 다이코지 (国泰祐松院殿霊山俊龍大居士) |
가문 | 도요토미 가문 |
본성 | 헤이시 (평씨) 후지와라씨 (藤原氏) 도요토미씨 (豊臣氏) |
씨족 | 기노시타씨 하시바씨 |
아버지 | 기노시타 야에몬 |
어머니 | 오만도코로 |
배우자 | 고다이인 요도도노 |
첩 | 가이히메 |
자녀 | 하시바 히데카쓰 (양자) 도요토미 쓰루마쓰 도요토미 히데요리 |
친척 | 도요토미 히데나가 (이복형) 아사히노 가타 (이복누이) 도모 (도요토미) (누이) 도요토미 히데쓰구 (조카) 고노에 사키히사 (양아버지) |
묘소 | 도요쿠니 신사 (교토시)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후도인 (히로시마시) (히로시마시 히가시구 (히로시마시)) 고야산 오쿠노인 (와카야마현 고야정) 고쿠타이지 (히로시마시) (히로시마시 니시구 (히로시마시)) |
정치 경력 | |
직위 | 간파쿠 (관백) 다이조다이진 (태정대신) |
간파쿠 임기 시작 | 1585년 8월 6일 |
간파쿠 임기 종료 | 1592년 2월 10일 |
간파쿠 이전 | 니조 아키자네 |
간파쿠 이후 | 도요토미 히데쓰구 |
태정대신 임기 시작 | 1586년 2월 2일 |
태정대신 임기 종료 | 1598년 9월 18일 |
태정대신 이전 | 고노에 사키히사 |
태정대신 이후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주군 | 마쓰시타 유키쓰나 오다 노부나가 오다 히데노부 쇼켄 천황 고요제이 천황 |
군사 경력 | |
소속 |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일본 조정 |
주요 전투 | 이나바야마 공성전 가네가사키 포위전 (1570년) 아네가와 전투 나가시마 포위전 이치조다니 성 전투 이타미 포위전 (1574년) 나가시노 전투 미쓰지 포위전 데도리가와 전투 미키 포위전 돗토리 포위전 다카마쓰 포위전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네고로지 전투 도야마 전투 규슈 정벌 오다와라 포위전 (1590년) 임진왜란 |
지휘 시설 | 오사카 성 |
기타 정보 | |
칭호 | 다이묘 간파쿠 다이조다이진 |
로마자 표기 | Toyotomi Hideyoshi |
가나 표기 | とよとみ ひでよし |
한자 표기 | 豊臣 秀吉 |
한국어 한자음 | 풍신수길 |
휘장 | 고시치노키리 (五七の桐) |
말 인장 | 금 표주박 |
주요 갑옷 | 이치노타니 바란 투구 |
2. 생애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中村)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木下藤吉郎秀吉)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젊은 나이에 오다 가문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유력 무장이 되었고,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성을 바꾸었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공을 세워 나가하마, 다지마, 하리마 등을 다스리는 오다 가문의 중신(宿老) 중 한 명이 되었다.
1582년 주고쿠 지방 공략 중 주군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자, 모리 가문과 급히 강화를 맺고 교토로 빠르게 회군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했다. 이후 기요스 회의 등을 통해 오다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정권(도요토미 정권)을 수립하였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을 축조하고 1585년 관백, 1586년 태정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여 소부지령(惣無事令, 다이묘 간 사적 전투 금지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세력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확장, 1590년 호조 가문을 굴복시킨 오다와라 정벌을 통해 일본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후에는 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刀狩, 도검 몰수령), 석고제 등의 정책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주라쿠다이, 호코지(교토의 대불), 후시미성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으며, 다도, 미술 공예, 연예 등을 장려하여 모모야마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명나라 정복을 목표로 1592년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중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후계자로 삼았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숙청하는 등 정권 내부의 불안정을 야기했다. 1598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중 병으로 사망했으며, 어린 히데요리의 보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한 고다이로에게 맡겨졌다.
2. 1. 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명확한 역사적 사실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中村, 현재의 일본 나고야시 나카무라구)에서 태어났다.[249]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덴분 5년(1536년)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덴분 6년(1537년)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출생일 역시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등에서는 음력 1월 1일로 기록하고 아명을 히요시마루(日吉丸)라고 하지만,[249] 이는 후대의 창작으로 보이며, 《천정기(天正記)》나 가신 이토 히데모리(伊藤秀盛)의 기록에 따라 덴분 6년(1537년) 음력 2월 6일생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 있게 여겨진다.아버지에 대해서는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이라는 이름의 농민 혹은 오다씨의 아시가루(足軽, 보병)였다는 설이 있다.[5] 하지만 히데요시가 7세 때인 1543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져[6] 그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히데요시의 계부인 지쿠아미(竹阿弥)를 친아버지로 보기도 한다. 어머니는 오만도코로(大政所)로 알려진 나카(なか)이다. 아버지 야에몬 사후 어머니 나카는 지쿠아미와 재혼했으나, 히데요시는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학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집을 나와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태합소성기(太閤素性記)》에 따르면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8세에 고묘지(光明寺)에 들어갔으나 곧 뛰쳐나왔으며, 15세에 아버지의 유산을 일부 가지고 집을 나와 바늘 장수 등을 하며 떠돌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정확한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된다. 농민이나 아시가루 외에도, 목수나 대장장이 같은 기술자 집단 출신설(역사학자 오와다 데쓰오), 행상인 같은 비농업 종사자설(역사학자 이시이 스스무) 등이 있다. 또한 히데요시 일족이 사용한 가문(家紋)이나 통칭, 친족들의 출신 등을 근거로 미즈노씨(水野氏) 출신이라는 설, 심지어 유랑민 집단인 산카(サンカ) 출신이라는 설까지 존재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입증되지는 않았다. 히데요시가 사용했던 '기노시타'(木下)라는 성씨조차 본래 그의 성이 아니라, 아내 네네(ねね)의 외가 성씨를 빌렸다는 주장도 있다.[78][149] 이는 히데요시가 성씨를 가질 만한 기반조차 없는 매우 낮은 계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히데요시 본인이나 주변 인물들이 그의 미천한 출신을 감추거나 미화하기 위해 기록을 왜곡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히데요시가 자신의 전기를 쓰게 한 오무라 유키(大村由己)는 기록에서 히데요시의 신분에 대해 모호하거나 심지어 천황의 숨겨진 자손임을 암시하는 듯한 기술을 남기기도 했으나,[79] 이는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른 의도적인 윤색으로 여겨진다.[78][79]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히데요시가 젊은 시절 산에서 땔감을 베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일본교회사』에는 '나무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그가 매우 가난하고 낮은 신분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불확실하고 낮은 신분은 히데요시의 생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본 전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출신 때문에 전통적인 무가 정권의 최고 지위인 쇼군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관백과 태정대신을 거쳐 태합(太閤)이라는 칭호를 사용해야 했다. 또한 그의 출신은 동시대의 다른 다이묘나 무사들, 심지어 평민들에게까지 내심 무시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집을 나온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 藤吉郎)라는 이름으로 이마가와씨의 가신인 마쓰시다 유키쓰나(松下之綱)를 잠시 섬겼으나[7] 곧 그만두었다. 1570년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편, 히데요시의 출신과 관련하여 그가 권력을 잡은 후인 덴쇼 15년(1587년), 자신을 히데요시의 이복형제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났으나 어머니 오만도코로가 모르는 인물이라고 하자 처형당한 사건이나, 몇 달 후 오와리국에서 찾아낸 이복자매를 오사카로 유인하여 처형한 사건 등은[234][235] 그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출신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히데요시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형제자매는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와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뿐이었다.[235]
2. 2. 오다 가신 시대
덴분 23년(1554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 잡무를 보던 하인)로 들어가 섬기기 시작했다.[250][7]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추운 날 노부나가의 짚신을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바쳤고,[8] 변소 청소를 맡았을 때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했으며, 물건 구매 시 자기 돈을 보태어 싸고 좋은 물건을 구해오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251] 《간양록》에는 노부나가가 금술잔을 우물에 빠뜨렸을 때, 물동이 수백 개에 물을 채워 한꺼번에 쏟아부어 수위를 높여 잔을 건져냈다는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기요스성 수리[9]나 부엌 관리(台所奉行) 등에서도 기발한 생각과 솔선수범으로 성과를 보여[9] 점차 오다 가문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외모를 보고 '원숭이(猿)' 또는 '대머리 쥐(禿げ鼠)'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에이로쿠 4년(1561년),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이자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딸인 네네(寧々)와 결혼했다.
미노 국의 사이토 다쓰오키 공략 당시, 적진인 사이토 씨 영지에 하룻밤 만에 스노마타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는 주로 후대의 기록인 《무공야화》 등에 근거한 것으로, 동시대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아 에도 시대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27] 이 시기 히데요시는 다케나카 시게하루, 하치스카 마사카쓰, 마에노 나가야스 등 미노의 유력 인사들을 설득하여 오다 가문에 귀순시키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1567년 이나바 산성 공략 성공에 크게 기여했으며,[10] 에이로쿠 11년(1568년) 음력 9월에는 오미 국의 미쓰쿠리 성 공략에서도 활약했다(간논지 성 전투).
같은 해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15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교토에 입성하자,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했다. 이 무렵부터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노부나가의 중신인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와 '''시바'''타 가쓰이에( '''柴'''田 勝家)의 성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었다.
겐키 원년(1570년),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토벌전에 참전했으나, 동맹이던 오미 국 북부의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신하면서 가나가사키에서 급히 퇴각해야 했다(가네가사키 퇴각전). 이때 히데요시는 이케다 가쓰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등과 함께 후위 부대(殿)를 맡아 퇴각 작전을 성공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9][11] 이후 아네가와 전투 등 아자이, 아사쿠라 가문과의 전투에서도 계속해서 공을 세웠다.[9][11]
2. 3. 오다 정권 아래
덴분 23년(1554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250] 로서 섬기기 시작했다.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여러 잡일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특히 추운 날 노부나가의 짚신을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내놓아 노부나가를 기쁘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러한 기지와 성실함으로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점차 오다 가문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외모를 보고 노부나가가 '원숭이' 또는 '대머리 쥐'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에이로쿠 4년(1561년) 8월,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이자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딸인 네네와 결혼했다. 네네의 어머니는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네네는 이를 무릅쓰고 히데요시에게 시집갔다. 결혼식은 매우 검소하게 치러졌다.[80]
미노국의 사이토 다쓰오키와의 전투 중, 스노마타성 축성에 관한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시 사료에는 기록이 없어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무렵 다케나카 시게하루, 하치스카 마사카쓰, 마에노 나가야스 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에이로쿠 7년(1564년), 미노 국의 사이토 료큐와의 싸움에서 마쓰쿠라 성주 쓰보우치 토시사다나 우누마 성주 오사와 지로자에몬 등을 유인하는 작전을 성공시켰다.[81] 에이로쿠 11년(1568년) 음력 9월 오미 미쓰쿠리 성(箕作城) 공략에서 활약했으며(간논지성 전투), 같은 해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15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교토를 평정한 뒤에는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했다. 히데요시라는 이름이 처음 사료에 등장한 것은 에이로쿠 8년(1565년) 11월 2일자 문서이다.[78]
겐키 원년(1570년), 에치젠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토벌에 참전했으나, 동맹이던 북 오미의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신하여 오다 군을 배후에서 공격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히데요시는 이케다 가쓰마사, 아케치 미쓰히데와 함께 후위 부대(殿軍)를 맡아 무사히 퇴각시키는 공을 세웠다(가네가사키 전투). 이후 아네가와 전투 등 아자이, 아사쿠라 가문과의 전투에서 계속 공을 세웠고, 요코야마 성의 성주 대행(城代)에 임명되었다. 오다니 성 전투에서는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밤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겐키 4년(덴쇼 원년, 1573년) 7월 20일, 성씨를 기노시타(木下)에서 하시바(羽柴)로 바꾸었다('''하시바 히데요시''')[82]. 하시바라는 성씨는 오다 가문의 중신인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 勝家)에게서 한 글자씩 따왔다는 설이 있으나, 이 설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82] 같은 해 아자이 가문이 멸망하자, 그 영지였던 오미 북부 3개 군(郡)을 하사받았다. 처음에는 아자이 가문의 거성이었던 오다니 성에 들어갔으나, 산성이었던 탓에 비와호 호숫가의 이마하마(今浜)로 거처를 옮겨 새로 성을 쌓고 지명을 나가하마(長浜)로 고쳐 나가하마성의 성주가 되었다. 나가하마 성주가 된 후에는 옛 아자이 가문의 가신들이나 이시다 미쓰나리와 같은 지역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덴쇼 4년(1576년) 에치고국의 우에스기 겐신과 대치하던 호쿠리쿠 방면 군단장 시바타 가쓰이에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작전상의 의견 충돌로 노부나가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귀환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노부나가의 분노를 샀으나 곧 용서받았다. 이후 가쓰이에는 데도리강 전투에서 겐신에게 패배했다. 히데요시는 같은 해 야마토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쓰나가 히사히데 토벌 명령을 받아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시기 산성 전투).
덴쇼 5년(1577년), 노부나가로부터 주고쿠 공략 총대장으로 임명받아 하리마국으로 진군했다. 하리마의 고데라 가문 가신이었던 고데라 요시타카(小寺孝高, 후의 구로다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거성인 히메지성을 양도했고, 히데요시는 이를 주고쿠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덴쇼 7년(1579년)에는 비젠국과 미마사카국의 다이묘 우키타 나오이에를 복속시켜 주고쿠 지방의 강자인 모리 가문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점했지만, 셋쓰국의 아라키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키면서 주고쿠 공략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덴쇼 8년(1580년)에는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든 하리마 미키 성의 성주 벳쇼 나가하루를 공격했다. 2년에 걸친 포위 공격과 병량 고갈 작전 끝에 벳쇼 나가하루의 항복을 받아냈다(미키 전투). 이 공성전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자신의 유능한 참모였던 다케나카 시게하루를 잃었다. 같은 해 다지마국의 야마나 아키히로(山名堯熙)가 농성하던 아리코 산성(有子山城)을 공략하여 다지마 국을 오다 가문의 세력하에 두었다.
덴쇼 9년(1581년)에는 이나바의 돗토리 성을 공략했다. 당시 돗토리 성은 야마나 가문의 가신들이 야마나 도요쿠니를 추방하고 모리 가문의 깃카와 쓰네이에를 성주로 맞이하여 저항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성 주변의 식량을 미리 높은 가격으로 모두 사들여 성안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굶주리게 만드는 '병량 고사(兵糧攻め)' 작전을 통해 성을 함락시켰다(돗토리 성 전투). 같은 해 아와지국의 이와야 성을 공략하여 아와지 국 또한 세력권에 넣었다. 이후에도 주고쿠 지방 전역을 지배하던 모리 데루모토와의 전투를 계속 이어나갔다.
2. 4. 혼노지의 변에서 기요스 회의까지
덴쇼 10년(1582년) 음력 6월 2일,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자결하는 사건(혼노지의 변)이 발생했다.[13] 당시 히데요시는 주고쿠 지방에서 모리 데루모토의 군대와 대치하며 빗추국의 다카마쓰 성을 수공으로 공략하고 있었다.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밀을 유지했다.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을 가져온 사자를 직접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성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모리 데루모토 측과의 강화를 서둘렀다. 모리 가문의 책사 안코쿠지 에케이를 통해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강화 직후, 히데요시는 군대를 이끌고 매우 빠른 속도로 교토를 향해 회군했는데, 이를 '주고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라 부른다. 음력 6월 13일, 히데요시 군은 셋쓰국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군과 격돌했다(야마자키 전투). 이 전투에서 이케다 쓰네오키, 니와 나가히데뿐만 아니라 미쓰히데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기요히데, 다카야마 우콘까지 히데요시에게 가세하면서 히데요시 군이 승리했다. 미쓰히데는 패주하던 중 토착민에게 살해되었고[13], 히데요시는 교토를 장악하고 노부나가의 장례를 치렀다.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머리를 찾아 절에서 21일간 재를 올렸으며, 주군을 잃고 불안해하는 다른 가신들과 달리 태연하게 행동하여 위엄을 보였다고 한다.
음력 6월 27일, 오와리국의 기요스성에서는 오다 가문의 후계자와 영지 분할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기요스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간베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다. 하지만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를 성공시킨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적손자인 산보시(三法師)를 내세웠고, 이케다 쓰네오키와 니와 나가히데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히데요시는 어린 산보시의 후견인으로 노부타카를 지명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가쓰이에의 동의를 얻어냈다.
영지 분할 결과,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옛 영지였던 단바국, 야마시로국, 가와치국 일대의 28만 석 영지를 추가로 확보하여, 기존 필두 가신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보다 더 많은 영지를 갖게 되면서 오다 가문 내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2. 5.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대립
음력 6월 27일,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할을 결정하기 위해 기요스성에서 회의가 열렸다(기요스 회의). 이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오다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아케치 미쓰히데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영향력과 이케다 쓰네오키, 니와 나가히데의 지지에 힘입어 히데요시가 추천한 노부나가의 적손 산보시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산보시의 후견인으로 노부타카를 내세우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가쓰이에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25] 영지 분할에서도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옛 영지였던 단바, 야마시로, 가와치 28만 석을 추가로 확보하며, 나가하마 12만 석을 받은 가쓰이에보다 더 넓은 영지를 차지하게 되어 오다 가문 내에서 우위를 점했다.기요스 회의 이후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히데요시가 야마자키에 호지 성을 쌓고, 독자적으로 야마자키와 단바에서 검지를 실시하며 오다 가문의 여러 다이묘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자, 가쓰이에는 이를 문제 삼았다. 덴쇼 10년(1582년) 음력 10월, 가쓰이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 오다 노부타카와 손잡고 히데요시를 비판하는 탄핵장을 여러 다이묘에게 보냈다. 이에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15일,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넷째 아들인 하시바 히데카쓰를 상주로 내세워 성대하게 노부나가의 장례를 치르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위기를 넘겼다.
음력 12월, 에치젠의 가쓰이에가 폭설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히데요시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군사를 일으켰다. 음력 12월 9일, 이케다 쓰네오키 등 여러 다이묘와 함께 5만의 군을 이끌고 야마자키의 호지 성을 출발하여 11일에는 호리 히데마사의 사와야마 성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가쓰이에의 양자 시바타 가쓰토요가 지키는 나가하마성을 포위했다. 가쓰토요는 다른 양자인 시바타 가쓰마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회유에 넘어가 항복했다. 16일, 히데요시는 미노로 진격하여 이나바 잇테쓰를 항복시키고, 오다 노부카쓰의 지원을 받아 오다 노부타카의 가신 사이토 도시아키가 지키는 가지키 성을 함락시켰다. 고립된 기후성의 오다 노부타카는 결국 산보시를 히데요시에게 넘기고, 자신의 어머니 사카씨(坂氏)와 딸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
덴쇼 11년(1583년) 음력 1월, 반 히데요시파인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이세에서 히데요시 측의 이세 미네 성, 세키 성, 이세 가메야마 성을 공격했다. 히데요시는 음력 2월 10일 이세 북부로 군대를 파견했다. 12일 가즈마스의 거점인 구와나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후퇴하기도 했지만, 가모 우지사토, 호소카와 다다오키, 야마우치 가즈토요 등이 이끄는 군대가 음력 3월 3일 이세 가메야마 성을 함락시키면서 이세 전선에서도 점차 히데요시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음력 2월 28일, 호쿠리쿠에서는 가쓰이에 군의 선봉으로 마에다 도시이에가 출진했고, 음력 3월 9일에는 가쓰이에 본인이 이끄는 3만 대군이 오미로 향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이세 전선은 가모 우지사토에게 맡기고 급히 오미로 돌아와 11일부터 시바타 군과 대치하였다. 4월 13일,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던 시바타 가쓰토요의 가신 야마지 마사쿠니가 다시 가쓰이에 측으로 돌아서고, 오다 노부타카가 기후성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이나바 잇테쓰를 공격하는 등 잠시 가쓰이에 측이 유리한 듯 보였다.
4월 20일 이른 아침, 가쓰이에의 중신 사쿠마 모리마사는 히데요시가 미노로 출병한 틈을 타 오이와산(大岩山)과 이와사키산(岩崎山)의 히데요시 측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모리마사는 공을 서두른 나머지 가쓰이에의 명령을 어기고 점령한 요새에 머물렀다.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신속히 회군하여 21일 모리마사를 공격했다. 이때 마에다 도시이에가 히데요시 측으로 배신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가쓰이에 군은 크게 패배하여 에치젠으로 후퇴했다(시즈가타케 전투).[26]
히데요시는 퇴각하는 가쓰이에 군을 추격하여 24일, 가쓰이에의 거성인 기타노쇼 성이 공격당하자, 가쓰이에는 정실 부인인 오이치노 가타와 함께 자결하였다. 히데요시는 가가와 노토를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주었고, 에치젠은 전투에서 협력한 니와 나가히데에게 주었다. 음력 5월 2일(날짜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음), 히데요시는 미노를 공략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오다 노부타카마저 자결로 몰아넣었으며,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항복도 받아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실질적인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오다 가문의 대부분을 장악했다.[10]
2. 6.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립
덴쇼 12년(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의 연하 예 방문 요구를 계기로 그에게 반발하며 대립하였다. 음력 3월 6일,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와 내통했다는 의심으로 자신에게 전쟁을 반대하던 중신 아자이 나가토키(浅井長時), 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 쓰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를 살해하며 사실상 히데요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때 노부나가의 옛 맹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카쓰에게 가담했고, 이에야스와 내통하던 조소카베 모토치카와 기이의 사카이 무리(雑賀党) 등도 반 히데요시 세력으로 합류했다.이에 히데요시는 세키 모리노부(関盛信), 구키 요시타카, 오다 노부카네 등 이세 지역의 여러 장수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거취가 불분명하던 미노의 이케다 쓰네오키에게는 오와리와 미카와국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음력 3월 13일, 이케다 쓰네오키는 오다 노부카쓰의 가신 나카야마 가쓰타다(中山雄忠)가 지키던 이누야마성을 공격했고, 이세에서도 미네성을 함락시키는 등 공세를 펴나갔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노부카쓰 연합군도 즉시 반격에 나서, 하구로(羽黒)에 포진한 모리 나가요시를 격파했다(하구로 전투). 이후 연합군은 고마키(小牧)에 진을 치고 히데요시와 대치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사이카 무리 문제로 오사카에 발이 묶여 있었으나, 음력 3월 21일 오사카를 출발하여 27일 이누야마 성에 도착했다. 히데요시 군 역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면서 양측은 장기적인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당시 히데요시 군은 약 10만,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약 3만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앞선 하구로 전투에서 패배했던 모리 나가요시와 이케다 쓰네오키는 히데요시의 조카 미요시 히데쓰구(후의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음력 4월 6일 미카와 기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음력 4월 9일, 이를 간파한 도쿠가와 군의 역습으로 히데요시 군은 패배하였다. 이 나가쿠테 전투에서 이케다 쓰네오키와 그의 아들 모토스케, 그리고 모리 나가요시 등이 전사했다.[27][28] 이 전투는 결국 교착상태로 끝났지만, 히데요시의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27] 이에야스와 히데요시가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으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동맹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28] 이케다 쓰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의 전사 소식을 들은 양측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자, 히데요시는 가가노이 시게모치(加賀井重望)가 지키는 가가노이 성(加賀井城) 등 노부카쓰 측의 이가, 이세 지역 성들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결국 음력 11월 11일, 오다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으며 사실상 굴복했다. 이로 인해 대의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미카와로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후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전투 자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했지만, 동맹인 노부카쓰의 이탈로 인해 정치적으로는 히데요시가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야스는 결국 히데요시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전쟁 후 히데요시는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명되었다. 덴쇼 14년(1586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상경을 재촉하기 위해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副田吉成)에게 시집간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 오만도코로까지 인질로 보내며 이에야스를 압박했다. 결국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상경하였고,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하였다. 이로써 하시바 씨족과 도쿠가와 씨족 간의 전쟁 명분은 종식되었다.
2. 7. 도요토미 정권
〈오사카 여름의 진도 병풍〉]]덴쇼 11년(1583년)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분고국 다이묘 오토모 소린은 성의 화려함을 보고 "삼국무쌍의 성"이라고 칭찬했으나, 성의 일부 방어상 문제점은 히데요시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가 방어가 취약한 남쪽에 사나다마루라는 성채를 쌓아 방어를 강화했다).[223]
덴쇼 13년(1585년) 음력 3월 10일, 히데요시는 정2위 내대신(内大臣)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21일에는 기이 공략에 나서 사이카 무리(雑賀衆)와 전투를 벌였고, 도도 다카토라를 시켜 수령 스즈키 시게오키(鈴木重意)를 모살하여 기슈(紀州)를 평정했다(기슈 정벌). 또한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해서는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를 총대장으로 임명하여 출진시켰다. 이 전투에는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모리 군도 가세하여 음력 7월 25일 시코쿠를 평정하고, 모토치카에게는 도사국만을 안도해주었다(시코쿠 정벌).
음력 7월 11일, 히데요시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 관백(関白)에 취임했다.[29] 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쇼군은 겐지(源氏) 혈통만 가능하다는 관례 때문에 평민 출신인 히데요시가 쇼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후지와라 씨 귀족인 고노에 사키히사에게 입양되는 방식으로 관백 직위를 확보했다. 덴쇼 14년(1586년) 음력 9월 9일,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도요토미(豊臣) 성(姓)을 하사받았고[27], 음력 12월 25일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라 명실상부한 정권(도요토미 정권)을 확립했다. 히데요시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양자가 되어 막부를 열려 했으나 거절당해 관백이 되었다는 속설은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1587년에는 호화로운 저택인 주라쿠다이를 건설했고, 이듬해 고요제이 천황을 접대하기도 했다.[30]
같은 해(1586년), 히데요시는 엣추의 삿사 나리마사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오다 노부카쓰의 중재도 있어 나리마사를 용서하고 엣추 국 니카와군(新川郡)을 영지로 주었다. 이로써 기이, 시코쿠, 엣추가 히데요시의 세력권에 들어왔다. 또한 규슈 정복에 나서 시마즈씨의 지배를 끝내고자 했다.[36] 히데요시의 이복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규슈 동부 해안에 상륙하고, 히데요시 본인은 서쪽 지쿠젠국으로 진군했다. 1587년, 총 20만 명의 병력으로 사쓰마국에서 시마즈 군 3만 명과 대치하여 가고시마성을 포위했고(가고시마 공방전), 결국 시마즈 씨의 항복을 받아내 규슈를 평정했다(규슈 정벌).

규슈 평정 후 1587년, 히데요시는 바테렌 추방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이는 기리시탄 다이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당시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이루어지던 일본인 노예 매매(최소 5만 명 추산[39])를 금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37][38] 하지만 유럽과의 무역 관계 때문에 실제로는 개별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1588년, 히데요시는 농민을 포함한 무사 계급 외의 사람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가타나가리(刀狩, 검 수색)를 전국적으로 실시했다.[40] 몰수한 무기는 붓다 상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고 발표되었다. 이 정책은 농민 반란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다이묘들의 사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켜 중앙 집권적인 안정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덴쇼 17년(1589년), 측실 요도도노에게서 아들 쓰루마쓰(鶴松)가 태어나자 후계자로 삼았다. 같은 해, 호조 가문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猪俣邦憲)가 사나다 가문의 나구루미 성(名胡桃城)을 탈취한 사건을 빌미로, 덴쇼 18년(1590년) 히데요시는 호조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간토로 출병했다(오다와라 정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전국의 다이묘들을 동원한 총 병력 21만(일설에는 22만[41])의 대군으로 호조 가문의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 당시 오다와라 성에는 8만 2천 명의 병력이 있었다.[41]
오다와라 성은 견고하여 이전에도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이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히데요시 군은 병농분리 정책 덕분에 장기 농성이 가능했다. 또한 호조 가문 내부의 의견 대립으로 단결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히데요시는 성 근처에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을 하룻밤 만에 지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수비군의 사기를 꺾는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41] 결국 3개월간의 포위 끝에 오다와라 성은 함락되었고,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테루는 할복했으며, 당주 호조 우지나오는 고야 산으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명실상부한 일본 통일을 달성했다. 오다와라 정벌 중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기존 영지 대신 호조 가문의 옛 영지인 간토 8개 주를 제안했고, 이에야스는 이를 수락했다.[41]

히데요시는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천황과 조정의 권위를 적극 활용했다. 관백의 지위를 얻은 뒤, 여러 다이묘들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편입시켰다. 천황의 이름으로 총무사령(惣無事令, 다이묘 간의 사적인 전쟁 금지)을 내리고, 이를 따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규슈와 간토 정벌을 정당화했다. 이는 과거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 쇼군의 권위를 이용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히데요시는 또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조정의 관직을 수여하여 천황 중심의 위계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무가 관백제(武家関白制)'를 구축했다. 비록 형식상 천황의 신하였지만,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는 히데요시였음이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는 성인친왕(誠仁親王)의 아들 팔조궁 지닌친왕(八条宮智仁親王)을 양자로 삼아, 장차 천황가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 히데요시는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총무사령 외에도 가타나가리(刀狩令),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는 싸움중지령, 해적 행위를 금지하는 해적정지령 등을 통해 국내의 무력 충돌을 억제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도요토미 평화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도량형 통일 후 전국적으로 태합검지를 실시하여 토지 소유와 생산량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석고제를 확립하여 조세 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 락시락좌 정책과 관소 폐지 등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계승, 확대하여 상업 활동을 촉진하기도 했다. 병농분리, 백성의 이동 금지, 주인선 무역, 화폐 주조 등도 추진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하의 연공(세금)은 일반적으로 수확의 3분의 2를 바치는 '이공일민(二公一民)'으로 알려져 있어 가혹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분쟁 해결 시의 기준이었을 뿐 실제 세율은 영주가 결정하여 일률적이지는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183]. 병농분리, 태합검지, 인신매매 금지령 등의 정책은 일본 사회를 중세적 노예제에서 근세적 농노제로 이행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84][185][186]. 이러한 정책들은 이후 에도 막부에 계승되어 에도 시대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를 근세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87][188][189].
히데요시는 빈농 출신으로 혈연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정권 운영을 위해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등용했으며,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최고 정책 결정 기구인 고다이로(五大老)와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고부교(五奉行)가 있었다.
조직 | 주요 인물 |
---|---|
고다이로 (五大老) |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초기 멤버, 사망 후 마에다 도시나가가 계승 논의됨) |
고부교 (五奉行) | 마에다 겐이 (필두),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 나가쓰카 마사이에 |
2. 8. 일본 통일
덴쇼 19년(1591년) 후계자로 지명했던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태합(太閤)'''으로 불렸다.같은 해 2월, 히데요시는 다도인 센노 리큐에게 할복을 명했다.[42]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신뢰받는 가신이자 다도의 대가였으며, 그의 영향 아래 일본 다도의 미학이 크게 발전했다. 리큐 사후 히데요시는 다도에서 노가쿠로 관심을 돌려 직접 공연하기도 했다.[43] 센노 리큐가 할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같은 해 도호쿠 지방 무쓰국에서 난부 씨 일족인 구노헤 마사자네가 다이묘 계승 문제로 난부 노부나오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쿠노헤의 난).[252] 히데요시는 노부나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양자이자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하고 가모 우지사토,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등을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도 합세하여 군세는 6만에 달했다. 9월 초 히데요시 군은 구노헤 성에 도착했고, 수적 열세에 몰린 마사자네는 항복했으나 성의 수비대와 함께 처형되었다.[44] 이 난의 진압은 센고쿠 시대 히데요시 원정의 마지막 전투였으며, 이로써 일본 통일이 완성되었다.[44]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자가 일본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이로 인해 현대 일본인들은 밑바닥부터 시작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을 '금태합(今太閤: 현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라 부르기도 한다.
2. 9. 임진왜란



임진왜란(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도 함)은 분로쿠 원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하에 일본이 명나라 정복과 조선 복속을 목표로 일으킨 침략 전쟁이다. 히데요시는 16만 대군을 동원하여 한반도 남부를 침공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조선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한성과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침략을 진행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특히 이순신의 활약은 함경도 온성까지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평양성에 주둔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쪽으로 서둘러 후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명나라의 원군 파병도 전황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93년 1월 7일,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한성을 포위했지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우키타 히데이에, 다치바나 무네시게,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이끄는 일본군은 현재의 고양시 지역에서 벌어진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수군이 사실상 궤멸되면서 일본군의 보급은 큰 차질을 빚었고, 이는 침략 전쟁의 장기화로 이어졌다. 결국 분로쿠 2년(1593년)부터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 전쟁의 원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253]
번호 | 내용 |
---|---|
1 | 유력 다이묘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공명심과 영웅 심리를 충족시키기 위함. |
2 | 뒤늦게 얻은 아들 쓰루마쓰의 죽음으로 인한 비통함을 전쟁으로 해소하려 함. |
3 | 해외 무역 장악을 목표로 함. |
4 |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 구상을 계승하여 실현하려 함. |
5 | 히데요시 개인의 천하 통일 야욕을 이루기 위함 (강화 조건으로 명나라 황녀와 조선 영토 할양 요구). |
6 | 쇼군이 될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영지 하사를 통해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려 함. |
7 | 일본 내부의 갈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함. |
특히,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쇼군이 되어 막부를 열 수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겐지 혈통만이 쇼군이 될 수 있다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쇼군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미마나(임나), 즉 조선 남부를 정복하고 이에 반대하는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 칭호를 받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쇼군이 되어 막부를 열고, 전쟁 과정에서 얻는 새로운 영지를 무사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불안정한 가신 관계를 공고히 하려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일본 내부의 반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상당수 다이묘들은 조선 침략에 반대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출진을 강행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풍토병, 황무지 개간, 지배 지역 치안 문제 등 여러 핑계를 대며 참전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군사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참전을 강력히 강요하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세력임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조선에 출병하지 못한 이유도 자리를 비웠을 때 일본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히데요시의 작전 의도 ===
히데요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종교(고니시는 로마 가톨릭, 가토는 불교), 성격(고니시는 온건파, 가토는 급진파) 등 여러 문제로 서로 앙숙 관계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둘을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는 두 사람의 경쟁심을 이용하여 최대한 빨리 조선을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각지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 군사력 증강과 바테렌 추방령 ===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준비하며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했다. 전투 부대를 기병과 보병으로 나누고, 사무라이대장(侍大將)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 단위 부대를 편성했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1586년 무렵부터 대규모 선박 건조 계획을 추진하여 침략 직전에는 천여 척, 종전 무렵에는 3천여 척의 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산요도, 산인도, 기나이 및 동부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 병력 33만을 동원할 준비를 마쳤다.
1586년,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유럽의 범선인 카락과 갤리온 구입을 시도했으나 포르투갈 상인들의 거절로 실패했다.[254] 대신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를 통해 포르투갈 군함 지원을 요청하여 승낙까지 받았으나, 이후 예수회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게 되어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255]
바테렌 추방령의 배경에는 1586년 5월, 예수회 일본 책임자 가스파르 코엘료와의 만남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규슈 정벌과 조선 출병 계획을 밝히며 협력을 요청했고, 성공 시 중국 내 교회 건설 협조와 포르투갈 군함 2척 지원을 약속했다. 코엘료는 이에 찬동하며 규슈의 로마 가톨릭 다이묘들과의 합동 작전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코엘료가 규슈의 로마 가톨릭 세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예수회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코엘료가 무장한 후스타선(Fusta 船)을 타고 히데요시를 방문하자, 히데요시는 예수회의 군사력과 영향력에 위기감을 느끼고 바테렌 추방령을 발표하게 된다. 이 추방령은 선교사의 강제 개종, 기독교도의 사찰 파괴, 일본인을 노예로 해외에 매각한 것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198] 다만, 이 추방령은 예수회의 복종적인 태도와 선박 부재 등의 문제로 즉시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고, 1591년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히데요시에게 고가의 선물을 바치면서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256]
===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
분로쿠 5년(1596년),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이 최종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게이초 2년(1597년) 14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재침략했다(정유재란). 강화 결렬의 주된 원인은 히데요시가 조선 남부 4도 할양, 명나라 황녀와 일본 천황의 혼인 등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교섭을 맡았던 심유경이 명나라에 허위 보고를 하여 히데요시의 분노를 키웠다는 견해도 있다.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며 경기도까지 진출했다. 이후 남해안으로 물러나 기존의 왜성 외곽에 새로운 성채를 쌓아 장기 주둔을 위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울산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는 등 고전을 겪으면서 일본군 내부에서는 전선 축소를 둘러싼 무단파와 문치파 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게이초 4년(1599년)에 다시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으나,[139] 1598년 8월에 병으로 사망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히데요시 사후, 고다이로(五大老)에 의해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 전쟁의 영향 ===
임진왜란은 참전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일본: 전쟁 과정에서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하고 활자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하여 도자기 문화와 인쇄술 발전에 이용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내부 갈등 심화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확대로 도요토미 정권은 붕괴하고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 조선: 국토가 황폐화되어 전후 복구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광해군 시기에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쳤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결국 병자호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명나라: 조선 파병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는 여진족의 후금이 성장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는 배경이 되었다.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 히데요시의 해외 팽창 구상 ===
임진왜란은 히데요시의 광대한 해외 팽창 구상의 일부였다. 그는 1587년 규슈 정벌 무렵부터 해외 진출을 구상했으며, 조선에 대해 일본 조정(히데요시)에 출사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과 같은 고대 선례를 근거로 조선 국왕 역시 일본의 다이묘처럼 자신에게 복속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221]
히데요시는 조선뿐만 아니라 1588년 류큐 왕국, 1591년 포르투갈령 인도와 스페인령 필리핀, 1593년 타이완으로 추정되는 고산국(高山國) 등 주변 여러 나라와 세력에게 복속과 조공을 요구했다.[221] 심지어 1592년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보낸 문서에서는 명나라 정복 후 베이징으로 천도를 옮기고 자신은 인도(천축) 정복을 위해 닝보로 이동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222]
침략 목표 달성을 위해 히데요시는 조선을 8개 도로 나누어 각 군단에 할당하는 '팔도분할'(八道国割|하치도쿠니와리일본어) 계획을 세웠다.
담당 군단 | 지휘관 | 목표 지역 |
---|---|---|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 | 평안도 |
제2군 | 가토 기요마사 | 함경도 |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 | 황해도 |
제4군 | 모리 가쓰나가 | 강원도 |
제5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 | 충청도 |
제6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전라도 |
제7군 | 모리 데루모토 | 경상도 |
제8군 | 우키타 히데이에 | 경기도 |
1596년 발생한 산페리페호 사건은 히데요시의 기독교 및 서양 세력에 대한 태도를 더욱 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히데요시는 스페인 선교사들을 포함한 26명의 기독교인을 처형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필리핀 총독에게 항복과 조공을 요구하며[214] 필리핀 정복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필리핀의 군사력을 5~6천 명 정도로 파악하고 1만 명의 병력이면 충분히 정복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217] 류큐와 타이완을 점령한 후 필리핀을 침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218][219]
이처럼 임진왜란은 단순한 조선 침략을 넘어 명나라, 나아가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던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적인 야욕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이 침략 전쟁은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 10.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1591년 9월,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쓰루마쓰(鶴松)가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복동생 히데나가(秀長)마저 병사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에 히데요시는 1592년 1월, 조카인 히데쓰구(秀次)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히데요시 본인은 관백(関白)에서 물러나 태합(太閤)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히데쓰구가 관백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분로쿠 2년(1593년), 측실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히데요리와 히데쓰구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후계 구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높아졌다.
결국 분로쿠 4년(1595년) 8월, 히데요시는 히데쓰구에게 악행과 모반 혐의 등을 이유로 관백직에서 폐위시키고 고야 산으로 추방한 뒤 할복을 명령했다.[47][52][53][54] 히데쓰구의 처형 이후, 그의 부인과 자녀 31명, 그리고 여러 가신들까지 교토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47][52][53][54] 히데쓰구의 보좌역이었던 마에노 나가야스 등 유력 가신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히데쓰구의 난행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아들 히데요리에게 권력을 안정적으로 넘겨주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인 히데쓰구를 제거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 사건에는 다테 마사무네,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 영향력 있는 다이묘들도 연루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들을 구명해주면서 목숨을 건졌다. 본래 히데요시는 이들 다이묘를 통해 이에야스를 견제하려 했지만, 오히려 이에야스에게 은혜를 입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에야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결속력을 약화시켰고,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11. 정유재란
1596년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조선 재침략을 명령했다. 히데요시는 조선 남부 4개 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와 혼례시키는 등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한 탓에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평가된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양측에 거짓 보고를 하여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히데요시는 재침략의 작전 목표를 "전라도를 완전히 정벌하고, 충청도·경기도까지 가능한 한 침공하며, 목표 달성 후에는 거점이 될 성곽을 건설하고 주둔군을 배치한다"고 설정했다.[137]1597년,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총대장으로 삼아 14만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정유재란).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기세를 몰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빠르게 점령했으며, 경기도 일부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군은 작전 목표에 따라 남해안으로 물러나 임진왜란 때 축조했던 기존 왜성 외곽에 새로운 성채를 더 쌓아 방어선을 강화하며 장기 주둔을 준비했다.
남해안에 왜성 방어선을 구축하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축조하던 울산왜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울산성 전투). 일본군은 극심한 고전 끝에 연합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138], 이 전투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본군은 경상도 지역에 발이 묶였다.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전선을 축소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무단파와 문치파 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598년, 일본군은 사천 전투와 순천성 전투 등에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의 공세를 여러 차례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끈 사천 전투는 일본군의 큰 승리 중 하나였으나, 전쟁 당사국 모두 지쳐가는 상황이었다. 히데요시 본인도 전쟁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에 있는 지휘관에게 "내 군인들이 이국 땅에서 망령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2]
일본군은 왜성 방어 체제를 완성한 후, 약 6만 4천 명의 병력을 남겨 방어를 강화하고 나머지 7만여 명은 일본 본토로 귀환시켰다.[138] 히데요시는 1599년에 다시 대규모 공세를 펼칠 계획을 세우고 각 장수에게 군량과 화약 비축을 명령했으나,[139]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히데요시 사후, 고다이로(五大老)는 조선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2. 12. 죽음

게이초 3년(1598년) 3월 15일, 히데요시는 다이고지의 여러 건물을 재건하고 정원을 조성하게 한 뒤, 각지에서 모은 700그루의 벚나무를 경내에 심었다. 그리고 아들 히데요리와 측실들을 데리고 성대한 벚꽃놀이(다이고의 벚꽃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5월부터 병석에 누웠고,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죽음을 예감한 히데요시는 5월 1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를 비롯한 오대장로와 그 아들들, 그리고 오봉행 중 마에다 겐이, 나가마쓰 마사이에에게 11개 조항의 유서를 남겨 히데요리의 앞날을 부탁했다. 유서를 받은 이들은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에 피로 서명하여 답했다. 7월 4일에는 후시미성으로 여러 다이묘들을 불러 모아 이에야스에게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다시 한번 간곡히 요청했으며, 8월 5일에는 오대장로에게 두 번째 유서를 작성했다. 또한 자신을 하치만신으로 신격화하고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매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결국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양력 9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위암으로 알려져 있지만, 뇌매독, 대장암, 이질[165], 요독증, 각기병[166], 신허[167], 감기[168], 심유경에 의한 독살설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젠코지 여래를 호코지 대불전으로 옮긴 것에 대한 벌로 죽었다고 인식되었다.[140] 히데요시가 세운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이 게이쵸 후시미 지진으로 파손되자, 그는 유서 깊은 시나노 젠코지 여래를 새로운 호코지의 본존으로 삼았는데, 불상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병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사망 전날, 젠코지 여래는 원래의 절로 돌아가기 위해 교토를 출발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임종 직전에는 여러 번 숨을 되찾았고, 헛소리를 했다고 전해진다.[141] 가까운 다이묘(大名)와 장군들에게 남긴 그의 유언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맡긴다. 남길 다른 생각은 없다. 너희와 헤어지는 것이 슬프다."였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임진왜란에 참전 중인 군대의 사기 저하를 우려하여 오대장로와 오봉행에 의해 한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신으로서 섬겨졌기 때문에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유해는 한동안 후시미성에 안치되었다. 게이초 4년(1599년) 4월 13일에는 후시미성에서 유해가 옮겨져 아미다가미네 정상에 매장되었다. 4월 18일에 천궁 의식이 거행되었고, 그때 “호코쿠신사”로 개칭되었다. 이에 앞서 4월 16일, 조정으로부터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의 신호가 주어졌다. 4월 19일에는 정일위의 신계가 주어졌다.

히데요시 사후, 오대장로와 오봉행은 합의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철수를 결정했다. 당시 일본군은 공격해 온 명·조선군에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 순천성 전투 등에서 승리했지만, 철수 명령에 따라 명군과 화의를 맺고 전면 철수했다.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죽음은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히데요시 사후, 5대 장로의 다른 구성원들은 이에야스의 야망을 억제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의 최고 장군 중 두 명인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전쟁 중 용감하게 싸웠지만 돌아와서는 도요토미 씨의 성주 이시다 미쓰나리가 권력을 잡은 것을 발견했다. 미쓰나리는 이 장군들을 경멸했고, 그들은 이에야스의 편에 섰다. 결국 1600년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이 미쓰나리의 서군(西軍)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시키면서 이에야스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1603년 쇼군(將軍)으로 임명되어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이에야스는 1614년과 1615년에 오사카성을 두 차례 공격(오사카 전투)하여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를 자살로 몰아넣고 도요토미 씨(豊臣氏)를 멸망시켰다.[50][51]
히데요시 사후 그의 무덤은 화려하게 조성되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회복을 명분으로 무덤을 파괴했다. 이는 임진왜란이 히데요시 개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현재는 히데요시가 모든 성년 상속인을 잃고 5살 된 히데요리만을 후계자로 남긴 것이 도요토미 정권의 약화와 최종 몰락의 주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2][53][54]
히데요시가 남긴 사세구(辞世の句, 죽기 전에 남기는 시)는 다음과 같다.
>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쓰유토 오치 쓰유토 기에니시 와가 미카나일본어
>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나니와노 고토와 유메노 마타 유메일본어
> (이슬처럼 떨어지고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몸이여. 나니와(오사카)에서의 영화도 꿈 속의 꿈이로다.)
3. 인물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정보다는 전쟁에 더 적합한 지도자였다는 평가가 있다.[257]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장기적으로 부하들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특유의 전투 지휘관 기질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정치 노선을 바꾸었고, 이것이 임진왜란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258] 그러나 내정 면에서는 가타나가리나 태합검지를 통해 병농분리(兵農分離, 무사와 농민의 신분 분리)와 생산력 향상을 도모했으며, 이러한 정책들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로 계승되기도 했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순발력은 매우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 점이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을 익히지 않은 문맹이었기에 사이쇼 조타이가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해야 했다.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정책 수립이나 문제 해결에는 약점을 보였다는 평가가 있으며,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성격 면에서는 적극적이어서, 전투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항상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스노마타성, 이시가키 산성을 단기간에 축조했다는 일화나, 가나가사키 전투에서의 후위 담당, 다카마쓰 성 수공(高松城の水攻め) 등 그의 기지와 능력을 보여주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농민 출신에서 일본의 최고 권력자 자리까지 오른 그의 생애는 '센고쿠 시대 최고의 출세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간관계 능력이 뛰어나 '사람을 사로잡는 자'로 불렸으며, 포용력이 넓다는 평가도 받는다. 규슈 정벌 당시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자신의 칼을 내주거나, 오다와라 정벌에 늦게 합류한 다테 마사무네를 단 둘이 만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방문하여 술자리를 갖기도 했으며, 이에야스의 측근이었으나 자신에게 투항한 이시카와 카즈마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170][171][172]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 중 더위에 지친 부상병들에게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삿갓을 나눠주었다는 일화나(『세키가하라 합전기』), 도망간 학을 관리하던 담당자를 용서하며 "일본 전체가 나의 정원이니 새장에 있을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명장언행록』[173]).
그러나 동시에 경박하고 탐욕스러우며 여색을 밝혔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들에 대한 잔인한 학살 명령은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귀무덤의 존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대범하다는 평가와는 달리, 쥬라쿠다이에 자신을 비방하는 낙서가 붙자 범인을 색출하여 관련자 수십 명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등[176] 옹졸하고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과거 후쿠오카 일향 일기 진압이나 모리 가문과의 국경 분쟁에서도 잔혹한 처형을 명령한 기록이 남아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요시를 뛰어난 무장이지만 기품이 부족하고, 매우 음탕하며, 속마음을 숨기고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 책략가로 묘사했다. 또한 부하들을 '우누'(汝, 너), '캍'(彼奴, 저놈) 등으로 부르며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고 기록했다.
어머니 다이세이쇼에 대한 효심은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쁜 와중에도 정실 부인이나 어머니 본인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자주 보냈으며, 임진왜란 중 어머니의 위독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하자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출신 신분의 한계 때문에 쇼군이 될 수 없었던 그는, 천황가의 권위를 이용하여 관백과 태정대신의 지위에 올라 권력을 장악했다. 쇼군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강했으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양자가 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기도 했다.[262]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쇼군이 되기 위한 명분 쌓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은 그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간에,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들의 희생을 낳은 침략 전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특히 개전 초 정발, 윤흥신, 송상현 등이 지키던 부산진, 다대포진, 동래성은 주민 전체가 몰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오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일본 내에서도 임진왜란은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공식적으로 히데요시 신격화가 부정되었으나 민간에서는 그의 인기가 여전하여 『에혼타이코키(絵本太閤記)』 등이 크게 유행하며 오늘날 히데요시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226] 조선 출병에 대해서는 하야시 모리카쓰(林守勝) 등 유학자들의 비판과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등 군국주의적 관점에서의 옹호가 공존했다.[227]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메이지 천황이 그를 "국위를 해외에 떨친 인물"로 평가하며 도요쿠니 신사 재건을 명하는 등[224] 국가적 차원에서 재평가되기도 했으며, 다이쇼 시대에는 정1위(正一位)가 추증되었다.[228]
4. 신체적 특징
모습이 원숭이를 닮아 어릴 적 이름이 '소원'(小猿|코자루일본어, 작은 원숭이)이었다고 한다. 『태합소생기』(太閤素生記)에는 히데요시의 어릴 적 이름이 '원숭이'(猿)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유산에 대한 기록에도 "아버지 사망 시 원숭이에게 영락 일관을 유품으로 남긴다"는 내용이 있다. 마쓰시타 유키쓰나(松下之綱)는 "원숭이를 보니 기형적인 사람이다. 원숭이인가 싶으면 사람이고, 사람인가 싶으면 원숭이이다"라고 평했으며, 모리씨 가신 다마키 요시야스(玉木吉保)는 "히데요시는 붉은 수염에 원숭이 눈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히데요시를 직접 만난 조선 사절은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録)에서 "히데요시는 얼굴이 작고 피부가 검으며 원숭이를 닮았다"고 묘사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역시 '일본사'(フロイス日本史|후로이스 니혼시일본어)에서 히데요시에 대해 "키가 작고 추악한 얼굴을 가졌으며, 한 손에 여섯 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눈이 튀어나왔고, 중국인처럼 수염이 적었다"고 기록했다. 히데요시 자신도 "모두가 보는 대로 나는 추한 얼굴을 하고 있고, 신체도 허약하지만, 내가 일본에서 성공한 것을 잊지 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히데요시가 원숭이라고 불린 것이 관백 취임 후 "말세는 따로 있지 않다. 나무 아래 원숭이 관백"이라는 낙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산왕 신앙(원숭이는 히요시타이샤의 사자)을 이용하기 위해 '원숭이'라는 별칭을 일부러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156]
키는 오늘날 기준으로 약 140cm 정도로 매우 작았으며, 인류 역사상 이보다 키가 작은 국가 지도자는 멕시코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 137cm) 정도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대머리 쥐'(禿げ鼠)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고다이인(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데요시를 질책하며 "저 대머리 쥐"라고 쓴 것이 현재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157] 다만 평소에도 그렇게 불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히데요시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하나 더 있는 다지증이었다.[264] 이에 대한 기록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외에도 마에다 도시이에의 회상록으로 알려진 『국조유언』(國祖遺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조유언』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여섯 번째 손가락'(六ツ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통 다지증은 유아기에 절단하지만, 히데요시는 평생 여섯 손가락으로 지냈다고 한다. 천하인이 되기 전에는 이를 숨기지 않았으나, 천하인이 된 후에는 기록에서 이 사실을 지우고 초상화에서도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숨기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의 다지증은 오랫동안 헛소문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사실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조선의 선비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도 히데요시의 오른손이 여섯 손가락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는 히데요시가 성장한 뒤 스스로 칼로 잘라냈다고 적혀 있다.[161][162] 『국조유언』에는 "태합께서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하나 더 있어 여섯 개였습니다. ... 그때 상께서는 어른이 되셨을 때, 또는 젊었을 때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잘라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장공께서는 태합을 '여섯 번째 손가락(六ツめ)'이라고 부르셨다고 전해집니다."[164]라는 내용이 있다.[163]
5. 가족 관계
히데요시의 아버지는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이며 1543년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오만도코로(大政所, 1513–1592)이다. 어머니 오만도코로는 야에몬 사후 타케아미(竹阿弥)와 재혼했다. 히데요시는 명문가인 고노에 가문의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 1536–1612)의 양자가 되기도 했다.
히데요시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누나 토모(とも, 1534–1625)는 소에다 진베(副田甚兵衛)와 결혼했다가 후에 미요시 요시후사(三好吉房)와 재혼하여 도요토미 히데쓰구와 도요토미 히데카쓰를 낳았다. 남동생은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1540–1591)이며, 여동생 아사히노카타(朝日の方, 1543–1590)는 소에다 오시나리(副田甚助)와 결혼했다가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재혼했다.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은 고다이인(高台院, 1541/1549–1624)으로, 이름은 네네(ねね) 또는 오네(おね)이며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로도 불렸다. 그녀는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의 딸이다. 히데요시와 고다이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여러 측실을 두었으며, 그중 일부는 자녀를 낳았다.
측실 | 설명 | 자녀 |
---|---|---|
미나미도노(南殿) |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의 딸이라는 설이 있음. 혹은 오요노카타 (아자이가 유필, 이시다 나가라쿠안의 딸) |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 이시마츠마루(石松丸), 장남, 1570–1576) 딸 (이름 불명) |
요도도노(淀殿) |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딸. 이름은 차차(茶々). 다이코인(大広院)이라고도 불림 (1569–1615). | 도요토미 쓰루마쓰(豊臣鶴松, 차남, 1589–1591)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삼남, 1593–1615) |
미나미노쓰보네(南の局) |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의 딸. | |
쿄고쿠 타츠코(京極竜子) | 마츠노마루도노(松の丸殿). 쿄고쿠 타카요시(京極高吉)의 딸. | |
마아히메(摩阿姫) | 가가도노(加賀殿).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 | |
카이히메(甲斐姫) |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의 딸. | |
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 |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의 양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딸. | |
산죠도노(三条殿) | 이름은 토라(とら).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의 딸. | |
히메지도노(姫路殿) |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의 딸. | |
히로사와노츠보네(広沢の局) | 나고야 츠네카츠(名護屋経述) 또는 쿠니미쓰 쿄쇼(国光慶恕)의 딸. | |
게츠케이인(月桂院) | 이름은 시마코(嶋子). 아시카가 요리즈미(足利頼純)의 딸. | |
코우노마에(香の前) | 오타네노카타(お種の方). 타카다 지로에몬(高田次郎右衛門)의 딸. 후에 다테 마사무네, 오니니와 쓰나모토의 측실이 됨. | |
엔유인(円融院) | 이름은 오후쿠(おふく), 법명은 호센니(法鮮尼). 미우라 노토노카미(三浦能登守)의 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생모. |
히데요시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많은 양자를 들였다.
이름 | 원 부모 | 비고 |
---|---|---|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 | 오다 노부나가의 4남 | 오츠기마루(於次丸). (1567–1586) |
오다 노부타카(織田信高) | 오다 노부나가의 7남 | 후에 도요토미 타카히로(豊臣孝裕)로 개명. (1576–1602) |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吉) | 오다 노부나가의 8남 | 후에 도요토미 무사시(豊臣武蔵)로 개명. (1573–1615) |
오다 노부요시(織田信良) | 오다 노부나가의 10남 | (d. 1609) |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 | 누나 토모와 미요시 요시후사의 차남 | 하시바 히데카쓰의 이름을 계승. (1569–1592) |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 | 누나 토모와 미요시 요시후사의 장남 | 히데요시의 관백직을 이었으나 후에 숙청됨. (1568–1595) |
도요토미 히데야스(豊臣秀保) | 누나 토모와 미요시 요시후사의 삼남 | (1579–1595) |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차남 | [233] |
이케다 나가요시(池田長吉) | 이케다 츠네오키의 삼남 | |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 (1574–1607)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의 5남 | 정실 고다이인의 조카. (1577–1602)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의 아들 | 양녀 고히메의 남편. (1572–1655) |
하치죠노미야 토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 |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6남 | 후에 가쓰라노미야(桂宮) 창설. (1579–1629) |
다테 히데무네(伊達秀宗) |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서자 |
또한 여러 명의 양녀를 두어 정략결혼 등에 활용했다.
이름 | 원 부모 | 비고 |
---|---|---|
고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 (1574–1634) |
마아히메(摩阿姫) |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 히데요시의 측실이기도 함. |
마에다 키쿠히메(菊姫) | 마에다 토시이에의 서녀 | 요절. (1578–1584) |
오히메(於姫) |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의 딸 |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정실. 요절. (1585–1591) |
치쿠린인(竹林院) |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딸 | 아키히메(安岐姫), 리요히메(理容姫)라고도 함.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정실. (1579/80–1649) |
다이젠인(大善院) |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딸 |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정실. |
차차(茶々) |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 히데요시의 측실이기도 함. |
하츠(初) |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 쿄고쿠 타카츠구(京極高次)의 정실. |
고우(江) |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 오에요(お江与). 사지 카즈나리(佐治一成) → 도요토미 히데카쓰 →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1573–1626) |
이토히메(糸姫) |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正勝)의 딸 |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정실. |
요코인(容光院) | 우키타 나오이에의 딸 |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의 정실. |
코노에 사키코(近衛前子) | 고노에 사키히사의 딸 | 고요제이 천황의 뇨고(女御). (1575–1630) |
도요토미 사다코(豊臣完子) | 고우와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딸 | 히데요시의 외손녀. 쿠죠 유키이에(九条幸家)와 결혼. (1592–1658) |
키쿠히메(菊姫) |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딸 | 양자 도요토미 히데야스(豊臣秀保)와 결혼. |
6. 관련 작품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재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은 일본을 중심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히데요시는 무장이면서도 애교가 넘치고, 무력보다는 지략으로 승리를 얻는 밝은 성격의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229] 일본에서는 히데요시를 소재로 한 작품군을 '태합기'라고 부른다.[242] 다만, 조루리나 가부키 같은 연극에서는 '태합(太閤)'이라는 관직명 대신 '대공(大功)'으로 바꾸어 '대공기(大功記)'라는 제목을 사용하거나, '태합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대공 히사요시(大功久吉)' 등으로 바꾸어 각색한 작품도 있다.[242]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은 매우 많으며, 그 목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는 대중문화 작품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드라마
- 한국
- KBS 1TV
- 《불멸의 이순신》 (2004년 ~ 2005년) - 이효정
- 《징비록》 (2015년) - 김규철
- 《임진왜란 1592》 (2016년) - 김응수
- MBC
- 《임진왜란》 (1985년) - 정진
- 《불의 여신 정이》 (2013년) - 안석환[265]
- SBS
- 《왕의 여자》 (2003년 ~ 2004년) - 정승현
- 일본
- NHK 대하드라마
- 《태합기》(1965년) - 오가타 켄 (히데요시 단독 주인공 작품[229])
- 《하늘과 땅과》(1969년) - 하마다 미츠오
- 《봄의 언덕길》(1971년) - 나카무라 시카쿠
- 《나라 훔친 이야기》(1973년) - 히노 쇼헤이
- 《황금의 나날》(1978년) - 오가타 켄
- 《여자 태합기》(1981년) - 니시다 토시유키
-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 - 타케다 테츠야
- 《독안룡 마사무네》(1987년) - 카츠 신타로
- 《카스가노 츠보네》(1989년) - 후지오카 타쿠야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1992년) - 나카무라 토오루
- 《류큐의 바람》(1993년) - 나카무라 토오루
- 《히데요시》(1996년) - 타케나카 나오토 (주연, 히데요시 단독 주인공 작품[229])
-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2002년) - 카가와 테루유키
- 《공명의 갈림길》(2006년) - 에모토 아키라
- 《천지인》(2009년) - 사사노 타카시
- 《고우~공주들의 전국~》(2011년) - 키시타니 고로
- 《군사 칸베에》(2014년) - 타케나카 나오토
- 《사나다마루》(2016년) - 코히나타 후미요
- 기타 일본 드라마
- 《태합기》 (1957년, 일본텔레비전) - 오오카와 타로
- 《신서 태합기》 (1959년, 마이니치방송) - 토미야 히데키 → 미야자키 테루오
- 《진판 태합기》 (1960년, KRT) - 야시로 카즈오
- 《아마카라 태합기》 (1967년, 마이니치방송) - 시라키 미노루
- 《청춘 태합기 지금에 봐라!》 (1970년, 일본텔레비전) - 나베 오사미
- 《신서 태합기》 (1973년, 테레비아사히) - 야마구치 타카시
- 《태합기》 (1987년,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 시바타 쿄헤이
- 《천하를 얻은 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1993년,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 야나기바 토시로
- 《도요토미 히데요시 천하를 얻다!》 (1995년, 테레비도쿄 12시간 초 와이드 드라마) - 나카무라 칸쿠로
- 《태합기 원숭이라 불린 남자》 (2003년, 후지텔레비전) - 쿠사나기 츠요시
- 《태합기 천하를 얻은 남자 히데요시》 (2006년, 테레비아사히) -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 영화
- 《폭렬닌자 고에몬》 (2009년) - 오쿠다 에이지
- 《키요스 회의》 (2013년) - 오오이즈미 요
- 《레전드 & 버터플라이》 (2023년) - 오토오 타쿠마
- 《그림책 태합기 (태공기십단목)》 (1908년, M 파테 상회) - 촬영: 오토코자와 슈쿠
- 《도요타이코 영화 이야기》 (1918년) - 오노에 마츠노스케
- 《출세 타이코 히요시마루》 (1919년) - 오노에 마츠노스케
- 《기노시타 도키치로》 (1921년) - 사와무라 시로고로
- 《태합기》 (1922년) - 오노에 마츠노스케
- 《대공기십단목》 (1922년) - 아라시 리토쿠
- 《대공기십단목》 (1923년) - 사와무라 시로고로
- 《기노시타 도키치로》 (1924년) - 사와무라 시로고로
- 《두본 태합기》 (1926년) - 마츠오 후미토
- 《하시바 치쿠고노카미》 (1926년) - 카타오카 사에몬
- 《기노시타 도키치로》 (1928년) - 미나가와 엔쇼
- 《출세 치쿠젠노카미》 (1928년) - 아야노코지 겐자부로
- 《도요타이코》 (1929년) - 카와즈 세이사부로
- 《영걸 히데요시》 (1929년) - 카와베 고로
- 《태합기 후지키치로 주졸의 권》 (1935년) - 오노에 에이고로
- 《태합기 후지키치로 출세비약의 권》 (1936년) - 오노에 에이고로
- 《괴동 히요시마루》 (1937년) - 이노우에 타쿠야
- 《출세 태합기》 (1938년) - 아라시 칸주로
- 《축언 태합기》 (1940년) - 후지이 미츠구
- 《부부 태합기》 (1940년) - 후지이 미츠구
- 《신랑 태합기》 (1945년) - 아라시 칸주로
- 《철요 태합기》 (1953년, 다이에이) - 모리시게 히사야 (감독: 카도 토시)
- 《신서 태합기 유전 히요시마루》 (1953년) - 토미야 히데키 → 이치카와 우타에몬
- 《신서 태합기 급습 오케하자마》 (1953년) - 이치카와 우타에몬
- 《나는 후지키치로》 (1955년) - 하야시 시게나리
- 《태합기》 (1958년) - 타카다 코키치
- 《호라후키 태합기》 (1964년, 도호) - 우에키 히토시 (감독: 후루사와 켄고)
- 《기요스 회의》 (2013년, 도호) - 오오이즈미 요 (감독: 미타니 코키)
- 《목》 (2023년, KADOKAWA) - 비트 다케시 (감독: 기타노 다케시)
- 소설
- 《신서 태합기》 - 요시카와 에이지
- 《이본 태합기》 - 야마오카 소하치
- 《신 태합기》 - 카이온지 초고로
- 《신사 태합기》 - 시바 료타로
- 《요설 태합기》 - 야마다 후타로
- 《꿈의 또 꿈》 - 츠모토 요
- 《히데요시 - 꿈을 넘어선 남자》 - 사카이야 타이치
- 《히데요시와 리큐》 - 노가미 야에코
- 《히데요시의 멍에》 - 카토 히로시
- 《히데요시의 활》 - 키노시타 마사키
- 《차 성인》 - 이토 준
- 《목》 - 비트 다케시
- 《흙을 아는 천하인》 (전국 무장전 서일본편 수록) - 이마무라 쇼고
- 만화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요코야마 미츠테루
- 《학습만화 일본의 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사마츠 후미오
- 《황금 태합기》 - 코지마 고세키 (원작: 이자와 모토히코)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구치 키요유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사이토 타카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츠치야마 시게루
- 《도요토미 히데요시 용장록 전국무장열전》
- 《전국인물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 타키 레이코 (원작: 스기타 토오루)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 토도 유타카 (원안: 아케치 켄자부로)
- 기타
- 회화: 도요토미기 오사카도 병풍[243]
- 무대: TEAM NACS 일본 공연 「WARRIOR〜노래 계속하는 사무라이 로맨스」 (2012년) - 오토오 타쿠마
- 보드게임: 《히데요시 군기》 (츠쿠다 호비)
- 컴퓨터 게임: 《태합입지전》 시리즈 (코에이)
- 가요곡:
- 단애〜도요토미 히데요시 (1973년, 작사: 사에키 타카오, 작곡: 후유키 토오루, 노래: 마츠자키 시게루)
- 오레와 후지키로 (1980년, 작사: 키타무라 토오지, 작곡: 엔도 미노루, 노래: 미나미 하루오)
- 묘사 방식의 변화
근현대에 제작된 픽션에서 히데요시는 밝고 애교 넘치는 인물, 지략가 등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1996년)에서 타케나카 나오토가 연기한 히데요시는 이러한 이미지에 가깝게 그려졌다.[229] 그러나 2014년 《군사 칸베에》에서 타케나카 나오토가 다시 연기한 히데요시는 늙고 추악해진 모습이 강조되었다.[229]
이후 작품들에서는 히데요시의 양면적인 모습이 부각되기도 한다. 2016년 《사나다마루》에서 코히나타 후미요는 사교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히데요시를 연기했고, 2020년 《기린이 온다》에서 사사키 쿠라노스케는 교활함과 익살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히데요시를 묘사했다.[230]
2019년 TV 아사히에서 방영된 "국민 10만 명이 진심으로 투표! 전국 무장 총선거"에서는 6위를 차지했다.[231]
7. 문화적 유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면에서 일본 사회를 변화시켰다. 그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도입하고[55], 검 수색(刀狩)을 통해 농민들의 무기 소유를 금지했으며[40], 사무라이들에게는 농지를 떠나 성읍에 거주하도록 요구했다.[57][58] 이러한 신분 개혁과 병농분리 정책은 이후 300년간 일본의 신분 제도를 공고히 하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일본 전역에 대한 포괄적인 토지 조사(検地)와 전수 조사를 명령하여[59] 석고제에 기반한 체계적인 과세 제도를 마련하고, 허가 없는 백성들의 이동을 제한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총무사령, 싸움중지령, 해적중지령 등을 포함하는 이른바 '도요토미 평화령'을 통해 다이묘 간의 사적인 전쟁이나 무력 충돌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일본 사회가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84][185][186]
1590년, 히데요시는 교토 방어를 위한 거점이자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오사카성을 완공했다. 또한 금각사에 영감을 받아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이동식 금색 다실을 만들어[63] 자신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교토에 도다이지 대불보다 더 큰 약 19m 높이의 호코지 대불(교토 대불) 건립을 추진했으나,[190] 완공 직전인 1596년 게이쵸 후시미 지진으로 대불이 크게 파손되었다. 히데요시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파손된 대불을 불경하게 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히데요시는 물질 문화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 다도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여 다기 수집, 사치스러운 다회(茶會) 후원, 센노 리큐와 같은 다도 명인들을 후원했다. 다도가 지배 계급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고급 도자기 수요가 급증했는데,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 과정에서 많은 양의 조선 도자기를 약탈하고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왔다.[62] 그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던 센노 리큐와 처음에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관계가 악화되자 결국 그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히데요시는 노가쿠에도 심취하여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하기도 했으며, 와카(和歌)를 짓고 서도에도 능했다. 또한 바둑 명인 본인방 산사에게 지도를 받았으며[236], 장기에서는 그에게 유리하도록 고안된 타이코 장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후 히데요시는 유언에 따라 자신을 신으로 모시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이라는 신호를 받아 도요쿠니 신사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오사카의 진에서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신호가 박탈되고 신사도 폐지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신사가 재건되었으며, 현재 교토,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 각지에 도요쿠니 신사가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교토 동쪽의 아미다가미네(阿弥陀ヶ峰)에는 그의 묘소인 도요쿠묘(豊国廟)가 조성되어 있다. 고다이지[238], 오사카성[239] 등 여러 사찰과 장소에 그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남아 있다.
8. 이름
히데요시는 낮은 신분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분 상승을 거치며 평생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출생 시 이름은 日吉丸|히요시마루일본어였다. 원복을 치른 후에는 木下 藤吉郎|기노시타 도키치로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면서 성과 이름을 바꾸어 나갔다. 처음에는 아내 오네(おね)의 성인 기노시타(木下氏)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하시바(羽柴氏)로 성을 바꾸었다[153]. 또한 지쿠젠노카미(筑前守)라는 명예 관직을 받아 羽柴筑前守秀吉|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일본어로 불리게 되었다.
1585년에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씨가 되었고, 1586년에는 정친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氏)라는 새로운 우지(氏) 즉, 성씨(姓氏)를 하사받았다. 도요토미 우지는 히데요시가 선택한 여러 동맹 세력에게도 함께 부여되었으며, 이들은 豐臣朝臣/豊臣朝臣|도요토미노아손일본어, 즉 '도요토미 가문의 조정 신하'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공식 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羽柴藤吉郎豐臣朝臣秀吉|하시바 도키치로 도요토미노아손 히데요시일본어로 기록되었다.
흔히 하시바에서 도요토미로 성을 바꾸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하시바는 묘지(苗字, 가문의 이름)이고 도요토미는 본성(本姓, 씨족의 이름)이다. 신분이 높아지면서 본성인 도요토미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묘지 자체는 죽을 때까지 하시바였다고 여겨진다[15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처럼 성씨 뒤에 '노(の)'를 붙여 읽는 것과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오다 노부나가는 묘지이므로 '노'를 붙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도요토미노 히데요시'로 읽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오카노 토모히코)[154]. 1583년 예수회 문헌에는 Faxiba Chiquiendono|파시바 치키엔도노pt(하시바 지쿠젠도노)로 표기되었다[155].
당시 가톨릭 자료에서는 그를 Cuambacondono|쿠암바콘도노es[67](関白|간파쿠일본어와 존칭 -도노(殿)에서 유래) 또는 "황제 Taicosama|타이코사마es"[67](太閤|타이코일본어, 은퇴한 관백을 뜻하며 관백과 정이대신 참조)와 존칭 -사마(様)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또한 히데요시는 얼굴 생김새와 마른 체격이 원숭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작은 원숭이'라는 뜻의 小猿|코자루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9. 대중문화 속 모습
근현대에 들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재로 한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픽션에서 그려지는 히데요시는 무장이면서도 애교가 넘치는 인물, 무력보다는 지략으로 승리를 얻는 등 밝은 성격의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229]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히데요시가 단독 주인공으로 두 번 등장했다. 1965년의 《태합기》와 1996년의 《히데요시》이다.[229] 1996년작 《히데요시》에서 배우 다케나카 나오토가 연기한 히데요시는 이러한 긍정적인 이미지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저속하고 야만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제치고 출세한 후에는 화려하고 밝게 행동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이 드라마는 1996년 1월 7일부터 12월 22일까지 방영되어 평균 시청률 30.5%를 기록했다. 반면, 다케나카 나오토는 2014년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서 다시 히데요시를 연기했는데, 이때는 늙고 추악해진 모습이 그려졌다.[229]
2016년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고히나타 후미요가 히데요시를 연기했다. 사교적이고 밝은 인물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이기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양면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2020년의 《기린이 온다》에서는 사사키 구라노스케가 히데요시 역을 맡아, 알 수 없는 욕망을 감춘 교활한 면모와 익살스러운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230]
영화에서도 히데요시는 다양하게 다뤄졌다.
- 1949년 멕시코의 영웅담 영화 《필립 데 헤수스》에서는 루이스 아세베스 카스타녜다가 히데요시에 해당하는 인물인 "Emperor Iroyoshi Taikosama|황제 이로요시 타이코사마eng"를 연기했다.[68]
- 2009년 일본의 역사 판타지 영화 《고에몬》에서는 오쿠다 에이지가 연기한 히데요시가 주인공 이시카와 고에몬의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 이는 1594년 고에몬이 히데요시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전설에 기반하지만,[69] 영화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나 전설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속 고에몬은 히데요시의 대역을 살해하고 처형을 피하며, 나중에 히데요시를 살해하고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개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오다 노부나가의 충실한 가신이자 복수자로 그려지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반대된다. 전설에 따르면 고에몬은 노부나가의 적인 미요시씨와 노부나가를 살해한 아케치 미쓰히데를 섬겼으며,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암살을 모두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다.[70]
- 2023년 영화 《구비》에서는 배우 겸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가 히데요시를 연기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그레이트 프리텐더》(2020)에서는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로랑 티에리가 히데요시를 여러 번 언급한다.[71] 또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에이지 오브 사무라이: 천하 통일의 시대》(2021)에서는 고사카 마사미가 히데요시를 연기하며 그의 삶과 권력 장악 과정을 다루었다.[72] 2024년 미니시리즈 《쇼군》에서는 배우 호타루 유키지로가 히데요시를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인 태합(나카무라 히데토시) 역을 맡았다.[73]
2019년 TV 아사히에서 방영된 「국민 10만 명이 진심으로 투표! 전국 무장 총선거」에서는 6위를 차지했다.[231]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재로 한 작품군은 일반적으로 《태합기》라고 불린다.[242] 다만, 조루리나 가부키 같은 전통 연극에서는 '태합(太閤)'이라는 관직명 대신 '대공(大功)'을 사용하여 《대공기》(大功記)라는 제목을 붙이거나, '태합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대공 히사요시(大功久吉)'로 바꾸어 각색한 작품도 있다.[242]
아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한 주요 작품 목록이다. 히데요시는 일본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므로, 조연이나 준주연으로 등장하는 작품까지 포함하면 그 수와 연기한 배우의 수는 매우 방대하다.
작품명 | 작가 |
---|---|
《신서태합기》 | 요시카와 에이지 |
《이본태합기》(異本太閤記) | 야마오카 소하치 |
《신태합기》(新太閤記) | 가이온지 조고로 |
《신사태합기》 | 시바 료타로 |
《요설태합기》(妖説太閤記) | 야마다 후타로 |
《몽중몽》(夢のまた夢) | 쓰모토 요 |
《히데요시 - 꿈을 넘어선 남자》(秀吉-夢を超えた男) | 사카이야 다이치 |
《히데요시와 리큐》(秀吉と利休) | 노가미 야에코 |
《히데요시의 멍에》(秀吉の枷) | 가토 히로시 |
《히데요시의 활》 | 기노시타 마사키 |
《다성》(茶聖) | 이토 준 |
《구비》(首) | 기타노 다케시 |
《흙을 아는 천하인》(土を知る天下人) (《전국무장전 서일본편》(戦国武将伝 西日本編) 수록) | 이마무라 쇼고 |
작품명 | 작가 (원작자) |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요코야마 미쓰테루 |
《학습만화 일본의 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学習漫画 日本の伝記 豊臣秀吉) | 히사마쓰 후미오 |
《황금태합기》(黄金太閤記) | 고지마 고세키 (이자와 모토히코 원작)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히구치 기요유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사이토 타카오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쓰치야마 시게루 |
《도요토미 히데요시 용장록 전국무장열전》(豊臣秀吉勇将録 戦国武将列伝) | |
《전국인물전 도요토미 히데요시》(戦国人物伝 豊臣秀吉) | 다키 레이코 (스기타 도루 원작)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일륜의 데마르카시온~》(信長を殺した男~日輪のデマルカシオン) | 도도 유타카 (아케치 겐자부로 원안) |
연도 | 작품명 | 제작사/감독 | 주연 배우 |
---|---|---|---|
1908 | 《에혼타이코키》(絵本太閤記(太功記十段目)) | M・파테 상회 (촬영: 오토코자와 슈쿠) | |
1918 | 《호타이코 영화 이야기》(豊太閤栄華物語) | 오노에 마쓰노스케 | |
1919 | 《출세태합 히요시마루》(出世大閤日吉丸) | 오노에 마쓰노스케 | |
1921 |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 | 사와무라 시로고로 | |
1922 | 《태합기》(太閤記) | 오노에 마쓰노스케 | |
1922 | 《대공기십단목》(大功記十段目) | 아라시 리토쿠 | |
1923 | 《대공기십단목》(大功記十段目) | 사와무라 시로고로 | |
1924 |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 | 사와무라 시로고로 | |
1926 | 《마메혼 태합기》(豆本太閤記) | 마쓰오 후미토 | |
1926 | 《하시바 지쿠고노카미》(羽柴筑後守) | 가타오카 사에몬 | |
1928 |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 | 지쓰카와 엔쇼 | |
1928 | 《출세 지쿠젠노카미》(出世筑前守) | 아야노코지 겐자부로 | |
1929 | 《호타이코》(豊太閤) | 가와즈 세이사부로 | |
1929 | 《영걸 히데요시》(英傑秀吉) | 가와베 고로 | |
1935 | 《태합기 도키치로 졸병의 권》(太閤記 藤吉郎走卒の巻) | 오노에 에이고로 | |
1936 | 《태합기 도키치로 출세비약의 권》(太閤記 藤吉郎出世飛躍の巻) | 오노에 에이고로 | |
1937 | 《괴동 히요시마루》(怪童日吉丸) | 이노우에 다쿠야 | |
1938 | 《출세태합기》(出世太閤記) | 아라시 간주로 | |
1940 | 《축언태합기》(祝言太閤記) | 후지이 미쓰구 | |
1940 | 《부부태합기》(夫婦太閤記) | 후지이 미쓰구 | |
1945 | 《신랑태합기》(花婿太閤記) | 아라시 간주로 | |
1953 | 《요철태합기》(凸凹太閤記) | 대영 (감독: 가도 빈) | 모리시게 히사야 |
1953 | 《신서태합기 유전 히요시마루》(新書太閤記 流転日吉丸) | 도미야 히데키 → 이치카와 우타에몬 | |
1953 | 《신서태합기 급습 오케하자마》(新書太閤記 急襲桶狭間) | 이치카와 우타에몬 | |
1955 | 《나는 도키치로다》(俺は藤吉郎) | 하야시 시게오 | |
1958 | 《태합기》(太閤記) | 다카다 고키치 | |
1964 | 《허풍선이 태합기》(ホラ吹き太閤記) | 도호 (감독: 후루사와 겐고) | 우에키 히토시 |
2013 | 《기요스 회의》(清須会議) | 도호 (감독: 미타니 고키) | 오이즈미 요 |
2023 | 《구비》(首) | 가도카와 영화 (감독: 기타노 다케시) | 기타노 다케시 |
연도 | 작품명 | 방송사 | 주연 배우 |
---|---|---|---|
1957 | 《태합기》(太閤記) | 일본 텔레비전 | 오카와 타로 |
1959 | 《신서태합기》(新書太閤記) | 마이니치 방송 | 도미야 히데키 → 미야자키 데루오 |
1960 | 《진판태합기》(珍版太閤記) | KRT (현 TBS) | 야시로 가즈오 |
1967 | 《달콤쌉쌀 태합기》(あまから太閤記) | 마이니치 방송 | 시라키 미노루 |
1965 | 《태합기》 | NHK 대하드라마 | 이시카와 히데키 → 오가타 겐 |
1970 | 《청춘태합기 지금 두고 봐!》(青春太閤記 いまにみておれ!) | 일본 텔레비전 | 나베 오사미 |
1973 | 《신서태합기》(新書太閤記) | TV 아사히 | 야마구치 다카시 |
1987 | 《태합기》(太閤記) |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 시바타 교헤이 |
1993 | 《천하를 얻은 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天下を獲った男 豊臣秀吉) |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 야나기바 토시로 |
1995 | 《도요토미 히데요시 천하를 얻다!》(豊臣秀吉 天下を獲る!) | TV 도쿄 12시간 초 와이드 드라마 | 나카무라 칸쿠로 |
1996 | 《히데요시》(秀吉) | NHK 대하드라마 | 다케나카 나오토 |
2003 | 《태합기 원숭이라 불린 남자》(太閤記 サルと呼ばれた男) | 후지 TV | 구사나기 쓰요시 |
2006 | 《태합기 ~천하를 얻은 남자 히데요시~》(太閤記〜天下を獲った男・秀吉) | TV 아사히 |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
{| class="wikitable"
|+ '''기타 매체 목록'''
|-
! 구분 !! 연도 !! 작품명 !! 제작/연출/작가/가수 등
|-
| '''무대''' || 2012 || TEAM NACS 니혼 공연 「WARRIOR〜노래 계속하는 사무라이 로맨스」 || 연출: 오토오 다쿠마
|-
| '''보드게임''' || || 《히데요시 군기》(秀吉軍記) || 쓰쿠다 하비
|-
| '''컴퓨터 게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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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外!豊臣秀吉が「徳川の時代に大人気」だった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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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吉が主役の大河ドラマは少ない? 竹中直人『秀吉』で晩年を描かなかった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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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うする家康』ムロツヨシはどう挑む? 竹中直人、佐々木蔵之介ら“秀吉俳優”を振り返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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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位~10位編】「国民10万人がガチ投票!戦国武将総選挙」ベスト30の順位結果発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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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吉の等身大像か 扉が封印された神社から発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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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台寺で秀吉とねねの木像特別公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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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城天守閣で「戦国の群像〜秀吉をとりまく人々〜」展 初公開「幸村の自筆書状」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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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像『豊臣秀吉公座像』が14日まで公開中(京都・西方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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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年間お蔵入りの豊臣秀吉像を公開 豊国神社「令和見守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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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 : 일본 선교의 부흥과 쇠퇴의 요인 분석을 통한 적절한 일본 선교 전략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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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리더십과 국가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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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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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지증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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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장,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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